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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1권, 박경리

category 글/책을읽다 2023. 9. 10. 10:58

suinaut

 

임명희는 조용하와 함께하며 수련을 했다. 그가 독점욕과 불복을 참지 못하며 행동할 때 명희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런 과정이 반복된다. 명희는 자기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에 많은 세월을 겪는다. 이상현은 그런 그녀를 만나고 놀란다. 당당해진 명희에 되려 당황한다. 상현에게는 던지고 가서 부딪힌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상현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상현은 꿈틀하듯 한순간 걸음을 옮겨놓지 못한다. 명희는 어느새 이렇게 당당해졌는가.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 어떻게 이처럼 당당해질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외적인 풍요가 이 여자를 당당하게 한 것은 아니겠지. 자기는 무엇인가. 명희는 눈에 보이게 자란 나무 같다. 대신 자신은 찌들었다. 지렛대같이 버텨온 자포자기의 호언을 버리니까 갑자기 이렇게 찌들어버리지 않았는가. 내 찌들어버린 꼴에 명희는 자신을 가졌더란 말인가. 애당초 행복 운운한 것부터 유치하였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을 한 것부터 실없는 짓이었다. 상현은 뜻밖에 명희를 만나 혼란에 빠진 자신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았다. 13.

 

석이는 야무네, 산청댁, 마당쇠댁을 대신해 전면에 나서 배후가 된다. 봉기를 찾아가 자살한 복동네를 그리 만든 게 자신이라고 실토하게 한다. 그리고 봉기 딸이 구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준다. 봉기가 하던 행동이 딸을 위한다는 핑계를 앞세울 수 있게 이해했지만 한계점을 넘는다. 반면 석이는 원하는 대로 했지만 속이 시원치 않다. 봉기가 가진 사정을 애처롭고 가여워한다.

모래밭을 지나서 봉기는 둑을 기어 올라간다. 웃음 때문에 배창자를 움켜쥐고 싶었던 충동이 일시에 가신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치민다. 산다는 것이 통곡인 것만 같다. 오뉴월, 커 가는 새끼를 먹이려고 야위어진 까치 생각을 한다. 봉기 늙은이도 그 야위어지는 까치 한 마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강물이 희번득인다. 밤에도 쉬지 않고 흐르는 강, 세월의 눈금도 없이 흘러가고 있다.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 여자같이 강물은 혼자 흐르고 있다. 88.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자리를 바꿔 반복하면 소문이 된다. 마을 사람은 주연이 아니어도 조연이나 출현 인물은 된다. 그들에게 봉기는 끝판왕이다. 그가 나쁜 사람이어야 한다. 복동네 양아들과 며느리는 조연이요 봉기는 주연이다. 대개 속에 걸리는 게 있는 사람이 더한 법이다.

출상을 본다는 생각은 깡그리 내던져버리고 오로지 흥미는 나타날 봉기한테 집중하는 것이었다. 타작마당은 마치 신풀이 한풀이의 장소로 변해간다. 상대가 심술궂기로 이름난 봉기였고, 안 좋은 꼬투리는 대개 한두 개쯤 갖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고소해하고 한층 신이 나는 모양이다. 말뚝같이, 송곳같이 복동네 심장을 때려박고 찌르지는 않았다손 치더라도 뒤꼍에서 바늘 하나쯤은 복동네 심장에 꽂았을, 그런 위인일수록 이상하게 남 보다 분개하고 규탄하고 처단하자는 주장이 강했으니. 그것도 양심인지 모를 일이다. 112.

 

김환이 돌아왔다. 김환이 죽었다. 돌아온 소식을 지삼만이 알았다. 일본에 말이 흘러 들어가게 했다. 김환과 석포가 체포됐다. 석포는 옥사했다. 김환은 자살했다. 

 

길상이 돌아왔다. 서대문에 갇혔다. 서희는 몸과 마음이 무너진다.

남편의 부드러운 음성이 울려왔다. 얼굴도 똑똑하게 떠오른다. 흰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은 창백한 얼굴이 망막 속에서 미소 짓고 있다. 깡마른 모습, 빛나는 눈동자 이야기할 때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눈밑에는 잔주름이 모여들었다. 기름기 군살 빠져버린 모습에는 자질구레한 생각마저 걸러낸 듯 확실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299.

 

기화가 갈 수 있는 바닥은 어디인가. 계속 내려간다. 죽지 못하고 살지 못한다. 살아갈 이유인 양현에 대한 모성마저 없어져간다. 기화로 정석은 곤란을 겪는다. 기화 때문만은 아니다. 석이가 일을 키우며 석이네는 선택지를 줄인다. 서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다정다감했던 그 감성은 어디로 갔는가. 사무치게 깊었던 그 숱한 한은 어디로 갔는가. 너그럽게 이해하고 푼수를 알며 물러나 앉을 줄 알던 그 조신스러움은 어디 갔는가. 욕심 없고 거짓 없던 그 천성은, 아니 연연하고 그 풍정이 사내들 마음을 사로잡던 기생 기화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그에게서는 양현을 향한 모성마저 없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나. 마약의 심연으로, 다정다감함이 유죄요, 다정다감함의 단죄인가. 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