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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6권, 박경리

category 글/책을읽다 2023. 5. 25. 12:11

suinaut

서희와 길상, 상현의 관계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먼저 상현과 서희 사이가 정리되었다. 상현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길상과 맞상대로 설정된 관계에 불만을 느꼈지만 서희와의 사이를 가까이하지 못한다. 서희는 그가 떠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여전히 길상이와 서희가 탐탁지 않다. 길상은 옥이네를 희생양 삼아 다른 길을 모색한다. 길상이 옥이와 옥이네 인생에 들어간 것은 자연 생태에 인간이 개입한 모양이다. 길상이 걷어들인 새 새끼는 죽었고, 옥이네는 서희의 제안을 거절한다. 옥이네는 길상에게 빚진 값을 갚으려 한다. 서희와 길상은 마음속 있던 얘기를 분노로 서로에게 쏟아낸다. 확인한다. 마차 사고로 그 둘은 재확인한다. 

서희는 망토를 벗어던지고 방바닥에 굴러떨어진 꾸러미를 주워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그것을 길상의 얼굴을 향해 냅다 던진다.
  "죽여버릴 테다!"
  서희는 방바닥에 주질러 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어릴 때처럼, 기가 넘어서 숨이 껄떡 넘어갈 것 같다. 언제나 서희는 그랬었다. 슬퍼서 우는 일은 없었다. 분해서 우는 것이다. 다만 어릴 때와 다르다면 치마꼬리를 꽉 물고 울음소리가 새나지 않게 우는 것뿐이다.
  "난 난 길상이하고 도망갈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 다 버리고 달아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단 말이야."
  철없이 주절대며 운다.
  "그 여자 방에 그, 그 여자 방에서 목도리를 봤단 말이야, 으흐흐흐흣..."
  길상의 눈동자가 한가운데 박힌다.
  "그 꾸러미가 뭔지 알어? 아느냐 말이야! 으흐흐... 모도리란 말이야 목도리"
  하더니 와락 달려들어 나동그러진 꾸러미를 낚아챈다. 포장지를 와득와득 잡아 찢는다. 알맹이가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집어든 서희는 또다시 길상의 면상을 향해 집어던진다. 진갈색 목도리가 얼굴을 스쳐서 무릎 위에 떨어진다.
 "헌 목도린 내버려! 내버리란 말이야! 흐흐흐... 으흐흐흣..." 127.

 

별당아씨처럼 그 속을 알 수 없던 서희가 토해내는 장면이다. 남은 소설에서 이 같은 장면을 다시 볼 수 없을 듯한 느낌이다. 옥이네에 걸려있던 길상의 목도리를 발견한 서희는 옥이네를 가까이 두어 길상을 말려 죽일 작정을 한다. 마음이 있든 없든 자신을 여관에 내버려 둔 채 옥이네에 머물렀다는 것 사실에 분노한다. 슬픔보다 분해서 우는 서희다. 옥이네를 나서 일본 상점에서 목도리를 사 온다. 목도리를 어떻게 하겠다는 자신 없는 서희는 진심을 담아 그의 얼굴에 내던진다. 어릴 적 우는 서희를 다독이지 못하는 길상은 갑작스러운 서희의 감정 분출에 어찌할 바 모르고 목도리만 손에 쥔 채 밖을 나선다.

'뱀아 뱀아. 만인간한테 저주를 받는 뱀아. 나는 슬픔 뱀이고 너도 슬픈 뱀이다. 난들 뱀이 되고 싶어 되었겠나. 넌들 뱀이 되고 싶어 되었겠나. 왜 뱀이 싫은가. 뱀이기 때문이다. 왜 싫은가. 상놈이기 때문이다. 어느 뼈다귀의 손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78.

 

길상은 절에 버려진 아이다. 백정의 자식이었는지 어떤 이유로 버려졌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절에 버려진 아이, 최참판댁에서 서희를 모시며 하인으로 자랐다.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사실 관계는 그를 끝없이 괴롭힌다. 

'신발이란... 발에 맞아야 하고.. 사람의 짝도 푼수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훈장어른 말씀이 옳습니다. 옳다마다요.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일 있을 수 없지요... 서희 그 아이가 실리에 너무 눈이 어두워서... 네에.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옳은 말씀이오. 옳다마다요.' 80.

 

서희가 길상을 고를 이유는 실리다. 서희는 어려서부터 길상에게 의지해왔다. 용정에 와서도 바깥일은 길상을 통했다. 서희에게 길상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오히려 야합이었으면 마음이라도 맞췄을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길상이가 바라본 서희도 그랬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했을까. 

 

 
토지 6(2부 2권)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제6권. 출간 이후 43년 동안 연재와 출판을 거듭하며 와전되거나 훼손되었던 작가의 원래 의도를 복원한 판본이다. 토지 편찬위원회가 2002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정본작업을 진행한 정황을 토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판본은 ‘연재본’이라는 작가의 평소 주장을 반영해 연재본을 저본으로 했다. 1969년에서 1994년까지 26년 동안 집필되었으며, 200자 원고지 4만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작품은 소설로 쓴 한국근대사라 할 수 있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민중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평사리의 대지주인 최참판댁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한 많은 역사가 폭넓게 펼쳐진다. 다양한 인간 군상과 반세기에 걸친 장대한 서사, 참다운 삶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등이 돋보인다. (2부 2권)
저자
박경리
출판
마로니에북스
출판일
2012.08.15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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