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구는 최참판댁의 재산을 잠식한다. 사람은 죽고 쫓겨나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서희는 별당에 고립된다. 주위를 지키던 이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평사리는 조준구에 의해 둘로 나뉘었고 그 둘은 한 방향으로 흘렀다. 반대하든, 찬성하지 않든, 의도는 다르지만 한 색이다. 죽음으로 사라지는 평사리 사람들, 사내가 되어가는 길상, 새로 등장하는 인물이 자리를 채운다.
전주 감영에서 효수 된 부친의 최후가 뭐 반드시 윤씨부인 탓도 아니겠고 오히려 피해자는 윤씨부인이겠는데 외곬으로 흐르는 환이 마음은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다. 윤씨부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리라는 억하심정, 물론 그 심정에는 최참판댁 마님이라는 신분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고 최치수의 어머님으로서 결코 환이의 어머니가 될 수 없었던 여인에 대한 원한도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치고도, 부자 이 대에 걸쳐 그들은 최참판댁에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남긴 것이다. 271.
운명의 굴레는 구르다 돌덩이에 치여 예상 못한 결과를 내놓는다. 서로 가진 주사위는 다르고 여섯 면에 적힌 점의 개수는 각자 다르다.
포악스럽고 음험하고 의심 많고 교만한 서희. 그러나 그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제 나이를 넘어선 명석한 일면이 있었다. 본시 조숙했지만 그간 겪었던 불행과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던 많은 죽음들로 해서 그의 마음은 나이보다 늙었고 미친 듯이 노할 적에도 마음 바닥에는 사태를 가늠하는 냉정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 서책에 묻혀 시간을 보내는 생활은 그를 위해 다행한 일이었으며 거기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또 지혜를 기르는 데 살찐 토양이 되어주었다. 언문으로 된 이야기책에서부터 서고에서 꺼내어 온 여러가지 한서를 읽었으며 그 중 오경의 하나인 춘추를 탐독했다. 그 밖에 서울서 발행되는 신문조각 같은 것도 가끔 읽었다. 심지어 조준구한테 배운 일본 글로 일본 책까지 한두 권 읽었다. 이쯤 되면 여식으로서 박학하고 세상 물정에 밝다하겠는데, 그것으로 총명한 천품을 무한히 닦아갈 수도 있겠는데 서희는 그 명석함도 자기 야심과 집념의 도구로 삼으려 했을 뿐 자신에게 합당치 못한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 총명이 뚫어본 사실일지라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명한 고집 앞에 이성은 물거품이 된다. 그에게는 꿈이 없다. 현실이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왜곡된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219.
서희는 아직 주위에 둘러싸여 있다.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작가는 포악스럽고 음험하고 의심 많고 교만하다 한다. 감옥 같은 별채에 머물며 지식과 지혜, 인내와 분노를 쌓은 서희는 앞으로 그것들을 풀 것인가. 난세에 영웅이 탄생하는 법이다.
봉순이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좋아했다. 누이 동생같이 생각해왔던 봉순이가 어느덧 여자로서 자기 앞에서게 된 요즘 실은 당황했던 것이다. 사랑스런 누이가 여자로, 사모하는 마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여자, 다만 여자로 보여졌다는 것은, 그것은 죄였다. 봉순이에게 죄를 짓는 일이었다. 234.
길상은 서희에게 향하는 마음을 억누른다. 남자가 되면서 여자를 느낀다. 곁에 있는 봉순이는 누이동생같이 생각해 왔다. 그런 봉순이가 여자로 느껴지자 당황한다. 길상이는 봉순이가 자신을 마음 두고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욕망을 억제하고 서희에 대한 이룰 수 없는 마음은 속세로 보낸 스님에 대한 원망이 앞선다. 욕망을 떨쳐버리려 평사리를 누비는 길상이다.
"양반이라면 치를 떨던 위인이, 그러나 그 자신은 상민의 배신으로 죽었으니, 녹두장군도 그러했고."
"핍박받는 상놈, 농민들을 이끌고 나간 내가 내 처자식은 그 상놈들 손에 잡혀 죽었으니 어찌 세상이 안 부끄러울 수 있겠나.”
"백성들이란 믿을 게 못 되네. 동학군이 왜군들 신무기에 무너졌다고들 하지만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바지저고리였겠나? 왜군들 신무기 앞에 육신보다 마음들이 먼저 무너졌던 게야." 268.
환이는 아버지 김개주는 동학당이다. 길을 지나던 환이는 자신을 기억하는 노인을 만난다. 그는 지난 동학당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워하는 듯, 후회하는 듯, 세상을 허무해한다. 노인은 핍박받는 상놈, 농민들을 이끄는 동학에 투신했으나 처자식은 그 상놈들에게 죽었다. 양반이라면 치를 떨던 녹두장군은 상민의 배신으로 죽었다. 본인 이익을 좇는 것은 본능이다.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함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기에 숭고하다 말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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