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는 기억이다. 우리 뇌는 많은 정보를 처리한다. 오감으로 느낀 정보를 단순히 저장한다. 감각으로 받아들인 자극에 반응을 더한다. 반응은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가공한다. 가공한 결과를 말로 하거나 머릿속 생각으로 끝낸다. 많은 것들이 뇌를 거쳐가지만 모두가 머무는 것은 아니다. 머릿속에 저장된 것이 기억이다. 기억은 지난 과거를 회상할 때 요긴하다. 기억은 다시 찾아볼 때 효과를 다한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의식하지 못하다 특정한 단어나, 장소, 시간을 마주하게 되면 불현듯 떠오른다. 추억이라 부른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자주 깜박해서 물건을 잘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다시 사들고 다녀도 어디엔가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반대로 작용해 챙겨야 할 물건들을 몇 번씩 더듬어가며 확인하다. 《오베라는 남자》로 유명해진 프레드릭 배크만은 《우리와 당신들》에서 말한다.
"아빠는 폭력을 믿지 않아, 레오. 왜냐하면 예전에 아빠는 우유를 쏟으면 할아버지한테 맞았거든. 덕분에 뭘 안 쏟게 되지는 않았어. 우유만 무서워하게 됐지.”
가진 기억력은 그대로였지만 확인하는 습관은 몸에 남아 강박이 되었다. 가진 게 많았다면 잃어버리는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물건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혼내기에도 지쳤을 것이다. 다른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잃어버려서 우산 개수가 늘지 않는데 잃어버리지 않으니 우산이 점점 늘어간다. 잃어버려도 그 수를 유지하는 물건으로는 라이터, 연필, 볼펜, 책이 될 것인데 줄어들지 않으니 난처하다.
사람 얼굴은 둘째 치고,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한 두 글자만 알고 있고는 했다. 그래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일정과 할 일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큰 도움을 받은 습관이 되었다. 스스로가 가진 기억을 신뢰하지 못하다 보니 남들과 기억력으로 다투는 때가 적었다.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정확한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해당 메모를 보여주며 이야기해주지만 쉽게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억을 신뢰한다.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조금씩은 비틀어진 조각들을 온전하다며 믿는다. 이때를 돌아보며 썩 훌륭하지 않은 기억력에 대한 신뢰를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대신 기록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기록은 계속 쌓여간다. 수첩이나 다이어리에 하던 메모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옮겼다. 이후 웹사이트로 바뀌었고 지금은 휴대폰 어플을 연다. 기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만 할 수 있던 것을 지금은 언제 어디서든 한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 듣기 어색한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목소리를 바로 녹음할 수 있는 방법도 가끔 이용한다. 산책을 나가며 떠오른 긴 생각은 녹음기 앱을 열어 저장한다. 다시 글로 남겨 메모 앱으로 옮긴다. 같은 목소리를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메모할 대상이 바뀌게 되면 이전 기록들을 읽게 된다. 쓰고 난 후 찾아보지 않았던 글들이 수두룩하다. 지난 글들을 읽으며 다른 생각을 이어간다. 그 시절 썼던 생각은 지금에서는 다르게 읽힌다. 방향을 틀어 넓어졌거나 더 앞서간다. 잘못된 방향을 잡아 뒤로 돌아온 것도 있다. 책을 읽으면 인상 깊은 문장을 기록한다. 같은 책을 다시 읽어 기록을 비교해보면 재밌는 현상이 있다. 비슷한 부분이 많이 겹친다. 시간이 지나 생각과 관점이 변했을 텐데 비교에 의한 결과는 섬뜩하다.
틈틈이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기록을 하는 게 절반이고 다시 보는 게 절반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일기도 좋고, 메모도 좋고, 글도 좋다. 뭐든 남기고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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