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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

category 글/짧은글 2022. 10. 11. 12:12

 

춥다. 집 안에서 입던 반바지가 얇고 구멍이 송송 뚫린 기능성 고탄력 직물로 된 긴 바지로 바꿔 입는다. 쌀쌀함을 느끼면 후리스를 껴입는다. 벗고 입고를 반복한다. 추워서 입으면 곧 덥다. 더워서 벗으면 금방 쌀쌀하다. 해가 나오지 않았거나 들어가 버리면 춥다. 해가 있으면 햇볕에 더워 껴입고 나가 옷을 벗는다. 집을 나서면 가야 할 장소와 시간을 떠올려야 한다. 장소가 안인가? 밖인가? 시간이 해가 있을 때인가? 없을 때인가? 

독서 모임은 저녁에 실내에서 한다. 반팔과 반바지 대신 그 위에 긴팔을 겹쳐 입고 긴바지로 대신한다. 다른 회원도 가벼웠던 옷차림이 길어지고 두껍다. 겹쳐입는 옷 개수가 많아졌다. 모임 장소에 도착해 일찍부터 작동시켜 온도를 맞추던 에어컨은 끝날 때까지 멈춰있다. 온도를 조절하거나 전원을 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여전히 반바지와 반팔을 입은  형님이 있다. 

해가 지니 날씨가 많이 춥죠?
어. 많이 쌀쌀하네.
안 추워요?
나한테는 딱 적당해.
오늘 추워서 보일러를 켜야 하는지 고민했어요.
오늘? 그래. 부모님 계시면 추울 수도 있지.
제가 추워서 고민했어요.

24도다. 보일러를 제어하는 액정에 적혀 있는 현재온도다. 희망온도를 1도 올려 25도에 맞춘다. 희망온도를 향해 보일러는 불탄다. 희망온도에 도달하면 보일러는 멈춘다. 후끈후끈하다. 1도 차이인데. 중간이 없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좌우 이념에 휘둘리지 않으며 다수 농민과 민중을 위하거나 좌우 모두를 이해하려 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1권에서부터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많았다. 10권을 향해 가면서 그들은 좌우를 선택하거나 선택해야만 했다. 손승호는 북에서 남으로 인민군이 내려오자 문화선전부에서 활동한다. 이학송은 북 노동당이 장악한 서울에서 신문사를 다닌다. 그때 김범우는 자신 선택으로 좌를 선택했지만 인민군 후퇴 때 선택이 부정당한다. 후퇴하던 박두병과 손승호는 김범우에 대한 배려로, 그 선택이 어쩔 수 없었으므로 또 한 번 선택 기회를 준다. 좌우가 반복적으로 장악하던 한반도에 이념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진 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라졌다.

샤워하며 온도를 맞추려 수도꼭지를 좌우로 움직인다. 뜨거워서 깜짝 놀라 좌로 민다. 열이 식고 차가워 우로 민다. 온탕과 냉장을 오가며 목욕하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샤워하는 물 온도에도 적용 가능하다면 건강에는 좋겠다. 오래 사용한 보일러를 새로 바꿨다. 좌우로 오가는 손 횟수가 전보다 줄었다. 기술 진보는 샤워 물 온도 맞추는데 중간을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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