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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권, 박경리

category 글/책을읽다 2023. 1. 31. 10:44

suinaut

최참판댁에는 윤씨 부인과 최치수, 별당 아씨, 서희, 그리고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쉬쉬하지만 마을에는 부풀려진 이야기로 오간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 사람이 집안이 가진 내력에 얽히고설킨 관계를 가지고 왔다. 구천이와 길상이는 최참판댁에 오게 된 사연이 안갯속에 가려져있다. 월선이와 용이는 사랑 이야기를 담당하고 강청댁은 피해자지만 거칠게 악다구니를 부려 동정이 가다 만다. 읽기 전 서희가 주인공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서희가 나오는 장면에 집중하지만 아직은 철없는 양반 계집 아이다. 

 

달은 산마루에서 떨어져나왔다. 아직은 붉지만 머지않아 창백해질 것이다. 희번덕이는 섬진강 저켠은 전라도 땅, 이켠은 경상도 땅, 너그럽게 그어진 능선은 확실한 윤곽을 드러낸다.
난간에 걸터앉아 달 뜨는 광경을 지켜보는 구천이의 눈이 번득하고 빛을 낸다.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참담한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32.

 

구천이는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최참판댁에 들어온 과정을 보면 의문이 생긴다. 묵묵히 일을 하며 길상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에서 큰 인물을 볼 때 느껴지는 묵직함을 와닿는다. 길상이와 나눈 대화 중 두 사람의 말투가 바뀐다. 피식 웃게 되지만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건가 싶다. 밤만 되면 참지 못하고 산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의문을 가져왔고 1권이 끝나 조금은 해소되었다.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이야기가 많다.

 

최참판댁은 조용하다. 서늘하다. 말을 아낀다. 어두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 속 서희는 밝았다. 윤씨는 할 말도 아낄 정도로 말을 아낀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부인 앞에서 몸과 말을 조심한다. 최치수는 병약하며 신경질적인 인물이다. 어둡고 차가우며 신경질적인, 그러나 감정적으로 격해지지 않는 그에게 다들 몸을 사린다. 서희는 천진난만한하다. 1권이 지나가는 사이 세월을 겪어 성장한다. 사라진 어머니는 갑작스럽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하는 집 안 분위기에 어린아이는 투정이 줄어든다.

 

"내 머리카락 하나 뽑아서 천하가 이롭다 한들 나는 그 짓을 아니하겠네."
"죽일 놈!"
치수는 빙그레 웃었다. 중국 춘추시대의 철학자, 철저한 개인주의와 쾌락설을 주장한 양자(楊)의 말을 치수가 인용하였기에 이동진은 양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328.

 

최치수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시간이 약이다.

'부인이 겪는 고초는 만인이 겪는 고초요. 부인 혼자만의 것이겠소?' 
문의원은 원수를 보는 것 같은 윤씨부인의 눈길을 조용히 받는다.
'당신네들은 내 목숨을 내 손이 닿지 않는 나무 위에 걸어놓으셨소. 그리고 너의 죄는 너 스스로 사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들 생각하시는 거요. 아직도 나는 내가 나를 벌주어야 한단 말씀이오?'
'부인, 부인의 죄목은 무엇이오? 부인이 죄라 생각하시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게 아니겠소? 허나 그것은 좋소이다. 다만 임의로 죽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목숨이란 말씀이오. 설령 삶이 죽음보다 고생스러울지라도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요. 제가 일개 의생으로 칠십 평생 얻은 것이라고는 사람의 목숨이 소중하다 그것이었소. 제 목숨뿐만 아니라 남의 목숨도, 죄가 있다면 사람마다 죄가 있을 것이요, 갚음이 있다면 사람마다 갚음이 있을 것이요. 살아야 할 사람이 죽는 것은 개죽음이요,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짐승일 따름,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소. 죽어야 마땅하거늘 이리 명이 붙어 있으니 나는 짐승이오.'
'불쌍한 짐승은 갚음이 없는 생이오. 부인에게는 죄가 없소. 지나간 일은 환각이오. 참으시오. 지금을 참으셔야 하오.'
'내 마음에 죄가 있소. 내 마음은 사악하오. 이 세상에서의 갚음보다 더 큰 형벌을 받고 싶은 거요. 나는 죽었어야 할 사람이오. 지옥에 떨어져서 도현의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이오.' 368.

 

윤씨 부인과 문의원이 마음속으로 건네받는 말이다. 짐승 같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남는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던진다. 철학과 뜻, 주변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죽어서 영향을 끼치는 게 사람이라고 하는데 살아서 영향을 끼치면 더 좋다. 

 

 
토지 1(1부 1권)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제1권. 출간 이후 43년 동안 연재와 출판을 거듭하며 와전되거나 훼손되었던 작가의 원래 의도를 복원한 판본이다. 토지 편찬위원회가 2002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정본작업을 진행한 정황을 토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판본은 ‘연재본’이라는 작가의 평소 주장을 반영해 연재본을 저본으로 했다. 1969년에서 1994년까지 26년 동안 집필되었으며, 200자 원고지 4만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작품은 소설로 쓴 한국근대사라 할 수 있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민중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평사리의 대지주인 최참판댁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한 많은 역사가 폭넓게 펼쳐진다. 다양한 인간 군상과 반세기에 걸친 장대한 서사, 참다운 삶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등이 돋보인다. (1부 1권)
저자
박경리
출판
마로니에북스
출판일
2012.08.15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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