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이야기로 시작한 9권은 지리산이 가진 크고 작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끝난다. 계속되는 전쟁과 전투. 우스갯소리가 대치 중인 두 무리를 오간다. 말이 통하고 비슷한 감정을 가진 동족상잔의 비극이 가진 역설이다. 마지막을 앞둔 9권이어서 그런지, 팽팽한 고무줄이 아닌 묘한 긴장감을 품고 있다. 뭔가 일어날 듯해서 긴장은 하고 있는데 일상이 되어 버린 긴장 속에서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기분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은 역사에 쓰일만한데 반복되는 단순 작업에 익숙해져 버린 작업자와 같다.
토담이든 싸리울이든 대발울이든 탱자나무울이 든 모두가 일치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토담을 쌓되 그 높이는 고샅을 걸어가는 보통 키의 어른 눈높이 정도로, 그냥 걸어갈 때는 집 안이 안 들여다보이고 무슨 볼일이 생겨 사람을 부르거나 인기척을 낼 때는 발뒤꿈치를 들어 목을 늘이면 집 안이 다 들여다보이도록 했다. 나머지 울타리들도 아무 때나 눈길만 돌리면 집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네 가지 울이 갖는 공통점은 모든 집들이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한마을이 한집안처럼 감추는 것 없이 터놓고 살며 서로서로 정을 나눈다는 친족의식과 집단의식의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울타리들은 도둑을 막자고 친 것이 아니라 경계의 표시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었고, 예로부터 부자면 부자일수록 권세가 크면 클수록 담은 두껍고 높아지게 마련이었다.
울타리에도 계급이 존재한다. 지킬 것이 많을수록 담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웃집 수저가 몇 개 인지 알던 시절 그들은 비슷한 형편에 내세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울타리는 야트막하고 허점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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