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권이 지나갔다. 이제 어디 가서 대화소재로 대하소설 장편 열 권을 읽었다고 말을 꺼낼 수 있겠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스러져간다. 지난 역사를 알고 책을 읽고 있으니 처음부터 갑갑한 가슴이 마음을 먹먹하게 죄여 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점멸한다. 죽음을 앞두고 역사 투쟁으로 전환하며 유언 같은 한 마디를 한다. 그들이 하는 말에 정치와 이념은 없었다. 억압받으며 살던 농민, 하층민이 입산하여 잠깐 세상을 살아 후련해한다. 오히려 불평과 후회를 발견했으면 덜 안타까웠을 텐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쉬움 없어한다. 그만큼이었으면 서로 죽임 없이도 방법이 있었을 거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죽음과 상처였고 휴전선으로 멈춘 전쟁은 지금 그대로다.
태백산맥은 이념으로 갈린 두 집단이 갈등한다.
나는 『태백산맥』의 거대함을 사랑하기보다는, 그 구체성을 사랑한다. 구체성이라는 것은, 삶과 역사에 대한 직접성이다. 이데올로기는 삶에 대한 직접성을 확보함으로써만 역사 앞에서 순결할 수 있다. - 김훈 (소설가) 추천글
하지만, 소설 속에 이념이 있는가? 이념이라는 거대함은 소재다. 그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구체성이 목적이다. 공산당은 사람들에게 사상을 주입하고 선동하며 세뇌한다. 민중에게는 현재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이들을 따라나선다. 그러나, 민중들이 살아가는 삶이다. 산에서도 살고, 남편, 아들을 내주며 가족을 건사하며 산다. 빨치산으로 살다 사라진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하대치와 외서댁은 살아남았다. 작품 속에서. 인상 깊었던 두 사람이 남아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마지막 권이어서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알고 있던 결말이어도 속이 쓰리다. 천점바구와 김혜자는 살아서 이루어지지 못 한 마음을 죽어서나마 눈 맞추고 맞잡은 손으로 대신한다. 빨치산 동무는 그들을 나무 근처에 합장하고 표식을 남긴다. 다른 대원이 죽어도 묻어주지 못하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전장에서 발견하는 연애 감정이라 애틋하다.
염상진 죽음은 마지막을 치닫는다. 목만 내걸린 그를 어머니와 부인이 찾아와 돌려 받으려 한다. 이루지 못하고 몸싸움만 벌인다. 염상구는 이곳을 찾아 형의 목을 내리고 돌려받는다. 염상구 생각을 묘사해주던 작가는 없었다. 죽음 앞에서 형을 용서하는 동생을 발견한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도 재물을 좇아 머리를 굴리던 모습을 떠올리면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전쟁은 멈춰 휴전이 되어서 대치할 필요는 없어졌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생긴 염상구는 그것을 더하는 행위로 형을 구했다고 생각해보는 건 억지가 아니다. 다만, 먼저 생각한 마음이 맞길 바란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을 쓰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많은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아 미리 유서를 작성했다. '내가 어느날 갑자기 죽으면 나를 고발한 그들이 나를 죽인 것입니다'라고 글을 써놓고 계속 책을 쓴다. 작가 생각을 여러 인물들 속에서 찾아본다. 김범우에서 서민영선생으로, 심재모로 이어지고 염상진, 이해룡이 하는 말에도 공감하고 우익이 하는 말속에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기도 했다. 태백산맥은 기록으로 가치를 인정하며 다양한 입장에 놓인 사람 이야기를 한데 모아 놓음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기보다 맥락을 알린다. 빨치산 생활을 글로 남긴 일에 찬사를 하는 문장이 책 표지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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