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로 끝난다. 전쟁은 미군을 끌어들였고 청년은 전장으로 끌려나간다. 피난 가기에 바쁜 사람들이다. 그 와중에 보도연맹원을 소집하고 감금했다. 남으로 동으로 떠나기 전에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했다. 권병제 서장은 명령을 수행한다. 자애병원 원장 전명환을 따로 구분해서 유치장에 넣어 두는 것과 함께 말이다. 전쟁이 불러 올 수많은 죽음을 목격해야 한다.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다.
권병제 서장은 읽기를 계속하면서 점점 알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백남식은 계속 권 서장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임만수가 함께 있어서 다 행이었다고 생각했다. 유순하고 자기 주장이 없는 줄 알았던 권 서장이 그렇게 맞대거리를 하고 나서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 성질 못 이겨 한 판 갈겨버리기라도 했으면 어찌 됐을 것인가. 그래, 저것도 일정 때부터 순사질해 먹었고, 서장까지 된 놈이 아닌가. 저놈도 겉보기하고는 다르게 속으로 감추고 있는 뭐가 있겠지. 명색이 서장인 데 내가 좀 심하긴 심했지. 정면으로 충돌해서 이익될 건 없지. 백남식은 담배를 빼들었다.
치우침 없이 균형 잡힌 시야와 정세를 읽을 줄 아는 합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난세에서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은 후세에서 보면 실망하게 되는 법이다.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배신감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추락하는 기분을 느낀다. 흐르는 물길을 거스르지 않는다. 강한 물살이 모든 가지를 꺾고 지나가는 것과 달리 꺾지 않아도 되는 가지라면 살짝 돌아가는 물살이다. 김범우, 손승호, 심재모, 서민영과 같은 사람들과는 편안해 보이고, 임만수, 염상구, 백남식과 함께 있어 불편하지만, 어디에서든 나서지 않는다. 무사를 우선으로 한다. 마냥 탓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이근술은 대척점이면서 평행선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 조선인 순사들이 앞을 다투어 몸을 숨기는 속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군내의 유일한 사람이 이근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다. 그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순사질도 전혀 그의 뜻으로 한 일이 아니었다. 그를 농업학교에 보내준 문중의 뜻에 밀려 순사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코지당하지 않은 순사가 이근술이다. 좌익 해방구였던 율어면에 지서장으로 간다.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억지로 보내지지 않고 자원한다. 이근술이 가진 자신감은 떳떳함에서 나온다. 생계를 위해, 살기 위해, 앞잡이를 하면서 지배 계층들보다 잔악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변명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참여하지 않거나 참여해도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정현동이 죽었다. 좌익으로 활동하는 정하섭의 아버지다. 소화에게는 같은 항렬로 정하섭과 자신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정현동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이익을 남기기 위해 분주하다. 인간 본성에는 이익을 탐하는 본능이 당연한 것이지만 크기가 커질수록, 그로 인해 손해 보는 사람이 나올수록 위험해진다. 정현동은 중도들판에 있는 농지 6만 평을 사들였다. 농지개혁을 피하지 못한 지주에게 가격을 후려쳐서 첫 번째 이익을 남겼다. 염전 허가를 받아 놓았으니 두 번째 이익이다. 논에 바닷물을 받아 염전으로 돈을 벌 생각이었다. 농지개혁이 마무리되면 다시 농사를 지으면 될 일이다. 염전과 농사로 선택의 여지가 늘어나는 것은 세 번째 이익이다. 하지만, 그 계획은 이루지 못한다.
바닷물로 논을 채우는 모습을 지켜본 소작인은 분노한다. 그리고, 논이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작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자신들의 아픔을 하소연하지만 들은 체하지 않는다. 그리고, 염전을 만든다는 말에 눈이 돌아버린다. 생계가 날아간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한데 쌀을 세상에 내보내는 논에 바닷물을 채워 염전을 만든다니, 캄캄한 눈은 분노로 붉게 타올랐다. 정현동에게 '니만 사람이냐'라며 낫으로 찍어 버린다.
서민영은 순천에서 넘어오고 있었다. 그는 기차의 창밖으로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1월의 추위만 가득한 황량한 들판이 연이어 지나 가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도 들판의 추위가 그대로 옮겨와 있었다. 그의 의식 속에는 겁에 질릴 대로 질린 12명의 핏기 없는 모습이 얼어붙어 있었다. 법정의 구형 장면이었다. 낫을 들었던 농부는 사형이었고, 나머지 11명은 5년 징역이었다. 살인죄와 살인방조죄가 각각 적용된 것이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요. 저로선 최선을 다한 겁니다.」 변호사의 말에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변호사를 대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사형을 구형받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우울은 형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피해자이면서 법정에 섰다는 사실에 있었다. 지주라는 부류들이 어떤 각성을 하지 않는 한 소작인들과의 관계는 계속 그런 식으로 끝판을 보게 될 것이고, 이중피해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세상이 어떤 꼴로 되어갈 것인지는 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살인 행위는 정당하지 않다. 여러 이익이 얽힌 관계에서 일방적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피해자이면서 끓어오른 분노를 참지 못 해 가해자가 되어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를 구형받았다. 기업이 부도가 나고 파산을 하는 와중에도 직원과 거래처에게 생계를 이을 수 있게 노력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사회에서 구축한 환경에서 이익을 얻은 개인이나 법인은 사회에 대한 책임이 뒤 따른다. 지주는 사회에서 부를 이룬 계층이다. 그들이 다른 국가나 다른 환경에서 같은 행위를 했다고 해서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책임지지 않았으며 무관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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