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구로 내려왔던 이들은 빨치산 투쟁으로 전환한다. 지난 거대한 역사 속에 이름 없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 기록을 다룬 징비록처럼 태백산맥은 기록에 치중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6.25까지 계층 간 갈등과 학살은 계속 반복되었다. 갑갑함이 사라질 만하면 답답해졌다. 계속되는 숨 막힘에 감정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외면하고 싶었다.
전쟁은 모든 걸 둘로 나누고 하나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민기홍은 쌀보다는 잡곡이 더 많은 밥을 아무 맛도 모르고 씹고 있었다. 그는 이미 어느 한쪽 편에 가담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처자식을 굶겨죽이지 않기 위해서건 어쨌건 간에 자신은 전시상황의 신문사에서 펜대를 놀리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을 들게 되었다. 전쟁은 정치의 적극적 수단이면서, 정치의 목적인 인간의 인간적 삶 자체를 파괴하는 괴물이었다. 전쟁의 기본은 적과 우방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가르는 것이었다. 그 양분법 앞에서는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중도적 입장은 기회주의일 뿐이었고, 객관적 입장은 방관주의일 뿐이었고, 종교적 사고는 허무주의일 뿐이었고, 개인적 판단은 이기주의일 뿐이었다. 전쟁이 정치를 넘어서 역사라는 명분과 맥을 대고 있을 때 그런 결론은 더욱 선명해졌다. 민기홍은 기회주의자이며 방관주의자이며 허무주의자이고 이기주의자인 자신이 그나마 해체되어 버리고 한쪽에 가담되어 있는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것을 박차지 않고 주저앉아 있는 것을 체념주의나 패배주의라고 한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 가진 속성이다. 재산 손해를 입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기 어려운 판에, 생명이 담보되어야 하는 전쟁에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는 어렵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선택 한 셈이다. 태백산맥을 통해 여러 번 목격했다. 민기홍도 그와 같다.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 이야기.
백두산이 담아 인 물을 '천지'라 하였고 한라산이 담아 인 물을 '백록담'이라고 한 것이다. 그 두 이름이 갖는 공통점은 '하늘'인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뜻이라는 뜻인 천지에는 절대한 존재인 하느님이 막연하게 상징되고 있는데 반하여 '흰사슴의 옷'이라는 백록담에는 하늘에만 산다는 하얀 사슴들이 내려와 목욕하는 터라서 그런 이름이 지어진거라는 사연이었다. 백록담에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의 전설이 있는데 왜 천지에는 그런 것이 없을까. 그리고 천지가 상징하고 있는 하느님과 백록담의 하얀 사슴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어쩌면, 하느님께서 천지에 하강하시어 목욕을 하셨다거나, 낯을 씻으셨다거나 발을 씻으셨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은 절대신성에 대해 불경을 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하얀 사슴의 무리는 하늘나라에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무슨 일을 땀 흘려 했기에 목욕을 하러 내려오는 것일까. 아마도 하얀 사슴들은 세상만상의 생성과 소멸을 도맡고, 질서와 조화를 다스리는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일을 하고, 하느님이 고단하시어 발이라도 천지물에 담그고 계시는 틈을 내어 한라산의 못에 목욕을 하러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야기가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 틀림없다 해도 옛사람들의 노력은 똑같이 닮은 두 산의 못에 그런 이름을 짓게 된 연유를 밝힌 것일 뿐, 두 가지의 신비를 밝혀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전설이 밝혀내고 있는 것은 두 산이 닮은 모습을 하고 반도땅의 끝과 끝에 자리 잡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는 필연의 관계설정이었다.
백두산 천지에 전설이 없었다니 신기하다. 조그마한 것에도 의미를 새기는 법인데 백두산 천지처럼 어마어마한 것을 그대로 두다니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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