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제목을 보며 3권 마지막에 피어오른 봉화를 떠올린다. 민중의 불꽃. 세 산봉우리에서 거의 동시에 봉화에 불을 피워 올렸다. 봉화로 연락을 취하기에는 가까운 곳이다. 그래서 전쟁 선포와 같은 의미로 해석한 심재모는 밤을 새운다. 마을을 포위하듯 피워 오른 불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곁에,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말한다. 4권에서도 다수는 먹고살기 힘들다. 그나마 쑥떡으로 설을 보내고, 아이들은 술찌꺼미에 취해 비틀거린다.
염상진은 지주에게 쌀을 가져 나와 횡계다리에 내놓았다. 쌀을 고루 나눠 설을 쇠도록 한다.
심재모는 쓴웃음을 지으며 모자를 집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느리게 일어서고 있는 김범우는, 어차피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한 전술전략이란 복합적이고 다목적적이게 마련이지만 이번 일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설을 진정으로 아파한 염상진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대립은 이랬으면 한다. 좋은 점을 부각해 선의를 얻었으면 좋겠다. 패로 몰아 죽이고 탄압하기보다 자기 세를 점점 키워나가는 선한 투쟁이었으면 좋겠다. 염상진은 지주에게 뺏은 쌀로 넉넉한 인심을 베푼다. 남 돈으로 선심 쓴다. 그러나, 쌀은 원래 주인에게 되돌아간다.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말들이 염상진을 편든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이 제일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이념, 사상 교육 없이 편을 만들었다. 어떤 사상이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바탕이어야 하는 이유다. 김범우 행보는 위험하다. 언제 좌익으로 몰려도 이상하지 않다.
서민영은 선생처럼 가르치는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문장 속에 거스를 수 없는 힘을 느낀다.
"우상숭배... 내 종교가 소중할수록, 신도가 확장되기를 바랄수록 남의 종교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헐뜯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불교가 부처님을 모신다고 하여 우상숭배라고 매도한다면, 그럼 우리 기독교가 세우는 십자가는 뭔가요. 부처님이나 십자가는 각 종교의 상징물이지 우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상을 숭배치 말라 하심은 인간 영혼을 사악하게 만드는 마귀 우상을 가리킨 것이지, 엄연한 경전을 가지고 내세관을 확립하고 있는 다른 종교의 상징물을 지칭해서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비난하라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교회 설립을 위해 도움을 요청하러 온 황 목사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서민영은 말을 아끼는 노력을 하지만 끝내 입을 뗀다. 그중에서 우상숭배에 관한 말이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각기 다른 종교들이 가진 뿌리를 따라가 보면 다를 게 없다. 표현하는 방식과 그 시대를 산 지역과 시간이 다를 뿐이다. 새로운 종교는 기존 종교에서 다른 방향으로 떨어져 나온다. 여러 곳으로 찌르는 듯 꺾어져 나오는 가지를 가진 나무와 같다. 다른 하나를 실행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다른 하나로 서로는 전체를 부정한다. 종교 교리를 밑받침하는 책을 보면 맥락에서 틀린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상황에서도 같은 결론을 얻길 원한다. 접붙이 한 가지에서는 여러 특성이 함께 있다.
염상진은 율어면을 해방구로 삼는다. 안에서 밖을 지킬 수 있는 지형을 가졌다. 스스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만큼 농사를 지을 수 있으며 들고 나는 데 길이 정해져 있다. 지키기 좋고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해방구 율어면과 관련해 재미있는 사연이 접수된다. 율어면에 있는 아들에게 며느리를 보내 임신을 시키고자 하는 노인이 나타났다. 대립이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인가. 그러나, 김범우, 손승호, 염상진, 심재모라는 인물들이 딱, 거기에 있어 성사된다. 손승호가 노파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김범우는 염상진과 심재모를 연결한다. 보증인 역할은 김범우가 맡는다. 눈앞이 어둡고 가슴 갑갑한 느낌이 가득한 문장 속에서 일상생활이 끼어들어 한 숨 내려둔다. 씨 받는데 이념 사상이 웬 말인가. 인간 본성과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사람이 승리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김범우 생각이 완성된 곳과 시간은 그때 그곳이다. 일본 학도병으로 전쟁에 나간 그는 미군 손에 잡힌다. 이후 미군 특수 요원으로 활동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니 미군 포로가 된다. 훈련을 받던 시절에서부터 비행기만 태우던 미군은 포로가 되자 효율성 있게 배를 태운다. 배가 도착한 곳은 하와이.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백도라지를 만난다. 백도라지는 박두병과 김범우에게 책과 의견을 나눈다. 둘은 세계정세와 사상 이론을 접한다.
학교 복도를 청소하는 것에 일본 교육 잔재가 남았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으레 과거로부터 이어지던 일이라 짐작했다.
김범우와 손승호는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나무복도에 윤기가 반들거렸다. 어린 조막손들의 정성스런 노동이 거기에 어려 있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무판자가 유리를 닮도록 반들거리는 데서 김범우는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청소도 교육이라고 강조한 일본교육의 모습이 변질 없이 그대로 시행되어 어린것들에게 불필요한 노동을 강요한 결과가 바로 그 복도의 반 들거림이었다.
이 문단을 일찍 접했다면, 일본 잔재를 부정한다는 의미로 손가락, 발가락에 나무 가시가 박히는 일은 피했을 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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