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한의 모닥불 마지막 권이다. 두껍고 활자는 많다. 여전히 아직 재밌다. 지역 계엄사령관으로 등장한 심재모에 관심이 간다. 배우려는 태도가 새롭다. 중간자 역할을 하기 위해 애쓴다. 다른 인물들이 보는 모습은 그렇지 않다. 치우쳐 보인다. 앞으로 조심스러워야 될 것 같다. 심재모는 합리적으로 보인다. 상업을 영위하던 집안에서 자란 새로운 유형이다. 농민과 지주, 지식인과 다르다. 그 앞에 가시길이 놓일 것 같다. 그때는 좌와 우뿐이다. 강해진 것을 따르지 않으면 반대편이 된다. 서민영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치우치지 않은 행동을 하려 한다. 그런 한 마디. "난 군인의 몸이오."
서민영은 고흥 사람으로 기독교 재단인 순천 매산학교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동경제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사범 영어 선생으로 있었다. 일과가 끝나면 농민야학 교장이었고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매사에 합리적이며 사리가 분명하게 행동하는 인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지향하는 바는 이상 농촌 건설이고, 굳이 성분을 따져 이야기하자만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다. 서민영에 대한 관심은 심재모에 못 미친다. 가르치는 듯한 인물 특성 때문이다. 작가는 서민영 입을 빌어 농촌 상황과 국내 정세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앞에 앉은 선생님을 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문장 사이 생각이 끼어들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으며 긴 문단이 끝날 때까지 한 호흡으로 읽어나가야 할 듯한 의무감을 느낀다. 그런데도 설명이 끝나고 나면, 긴 세월을 몇 장으로 함축해서 아쉬움이 생긴다.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서민영 선생이다. 다른 이들에게 의지가 된다. 김범우, 염상진, 손승호, 안창민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4인 4색이다. 예수를 받들어 모셔야 하는 신이 아닌 닮고자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점에서 크게 공감했다. 사회 진출을 해준다면 극과 극이 충돌이어도 그 완충을 해줄 지대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불편한 다리와 후학 양성을 위한 일을 탓하며 나서지 않는 점이 아쉽다.
안창민과 정하섭을 향한 이지숙과 소화의 마음이 고문당하는 중에도 눈에 띄었다. 염상구의 입을 빌리면, "니기럴, 사랑이라는 것이 먼지."
미쏘는 신체를 남북으로 가르고 정신을 이념으로 나눴다. 배성오 가족은 친일과 지주, 좌익으로 나뉘었다. 배성오가 한 좌익 활동은 가족들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배성오는 집 창고에 숨어있다 총격전에 죽었다. 과수원댁은 울부짖는다.
"이놈덜아, 이놈덜아, 내 아들 쥑였으면 죽은 몸띵이나 놓고 가그라아아. 워쩔라고 느그가 갖고 가냐. 살았을 때 빨갱이고 공산당이제 죽어서도 빨갱이고 공산당이다냐, 이놈덜아아!"
두 자식과 그 아이들이 과수원댁을 안방에서 이틀 밤낮을 지켜봤지만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열아홉 살 난 여동생은 어머니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발버둥질을 쳤고, 중학생 남동생은 소울음을 토해내며 창고 판자벽에 머리를 짓찧고 있었다. 읍내 공무원 형 배윤오는 출근 않고 술만 마신다. 동생과 어머니를 잃었다. 그가 신고해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안타깝다. 동족상잔이 있었던 역사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김범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사회개혁이라는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부르짖거나 실천하는 공산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사회개혁은 얼마든지 부르짖을 수 있고 실천될 수 있는 것입니다.
투철한 사상을 가진 염상진은 그 누구보다 행복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사상보다는 인간적 기대 성취를 바라며 그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일까.
사회개혁이 어느 한 체제에서만 통용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혁을 외쳐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듯이 해석하는 것을 옳지 않다.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신념을 갖춘 이들을 혐오하나 그만큼 부러워한다. 어느 철학, 이념, 사상이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다고 믿으니 늘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갈대와 같은 이들에게 단단한 나무는 질투에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염상진을 따르는 사람들은 인간 염상진 보다 사상을 우선하지 않는다. 여러 갈대를 한 데 묶어 흔들리지 않게 해 줄 염상진에게 위탁하는 것이다.
체제, 이념에 대한 해석이 자주 등장한다.
미쏘가 서로 자기네식 정권을 세우는 데 있어서 차이점을 보였으니, 그게 중대한 문제네. 그 차이점이란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하는 체제의 다른 점이 아니라 그 체제를 꾸미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네. 이북은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은 완전하게 정치적 사회적으로 숙청을 단행해 버렸네. 그래서 50만이 넘는 친일반민족자들이 삼팔선을 넘어 이남으로 도망을 나왔네. 그런데 이남에서는 이북과는 반대로 오히려 친일반민족자들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그들을 핵심세력으로 해서 정권을 세워나갔네. 서민영.
농민운동에 가담한 농민들의 경우에는 더 말 할 것이 없었지. 물론 앞에서 살폈듯이 농민단체 중에는 공산세력이 이끌었던 게 있었어. 그러나 거기에 연관된 농민 전부를 공산주의자로 보는 건 위험천만한 경솔이고 악의야. 설령 그들이 공산주의적 구호를 외쳤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소작쟁의의 수단일 뿐이었어. 그들이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신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정치의 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야. 다만 감상적이거나 소영웅적인 지식인이나 지하 공산조직이 그들을 이용했을 뿐이야. 서민영.
예수를 인간적인 친근감을 가지고 대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서민영 선생이었다. 그분은 기독교사회주의와 무교회주의자답게 예수를 신앙적 대상으로 떠받들지 않고 실천적 선구로 따르려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예수는 내용이었지 형식이 아니었고, 풀어야 할 숙제였지 맹종해야 할 심판자가 아니었다.
역사를 바로잡고 나아가지 못 한 부분을 안타까워하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 서민영을 참어른이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 제자들이 써놓은 글자를 모시려 하기보다 앞서 살아간 실천적 선구로 삼아 행동을 따르려 하는 모습도 그를 크게 만든다. 서민영에게 예수는 화두다.
- 저자
- 조정래
- 출판
- 해냄출판사
- 출판일
- 2020.10.15
- 직업
- 소설가
- 소속
- -
-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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