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두 사람이 함께 쓴 첫 책이다. 읽은 책이 양념되어 자신들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서른 편에 해당하는 편지를 담은 수록집이다. 이 둘은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깊게 보는 듯 하지만 고개를 옆으로 갸웃 돌려 시선에서 나오는 각도를 조금 튼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 고민하고 들여다본 느낌을 쉽게 표현한 것이 놀랍다. 하지만 쉬운 표현에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책을 소개하는 글에 독서와 책이 들어 있다. 맞는 말이다. 읽은 글 속 몇 문장을 덧붙여 자신들을 드러낸다.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이며 생각하는 머릿속이다. 책과 글을 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책과 문장을 인용하는 다른 글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소개된 책을 메모하지 않았다. 책 속에 쓰인 글보다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크기 때문이다.
희망과 절망의 아주 잦은 교차.
그건 잔인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인 일이기도 해. 희망 뒤에 절망이 온다고 생각하면 두렵지만 절망 뒤에 다시 희망이 온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돼. 물에 닿으면 스르륵 녹아 버리는 솜사탕 같은 희망일지라도 없는 것보단 있는 쪽이 나은 것 같아. 그래도 희망이 있어서, 좋은 날을 상상할 수 있어서 테이는 아주 불행하지는 않았을 거야. 혼란스럽기는 했겠지만. 193.
희망 뒤에 절망이 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희망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지만 절망이 올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작가는 절망 뒤에 희망이 온다고 하니 안심이다.
그러나 현이를 사랑하는 동안에 나는 다른 방식의 사랑을 배운다. 서로의 교집합 주위만을 빙글빙글 돌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서로가 가장 멀어질 수 있는 지점까지도 산책을 다녀오는 것이다. 서로의 세계가 완벽히 겹치지 않더라도 우리의 세계는 계속될 것이란 믿음이 내게는 있어서다. 그리고 그 믿음을 심어 준 현이가 바로 건너편 옥상에 있다. 7.
가장 멀어질 수 있는 지점까지 산책을 다녀와도 기다려 주는 사람은 흔치 않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거기 있을 거다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서로 신뢰를 가진 관계는 상상하기 어렵다. 누군가 하나가 희생하거나 신뢰하거나로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은 기적이라 한다. 그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전생에 나라를 몇 번 구해야 하는 거지.
나는 여전히 우리가 신기해. 생경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몰라. 우리가 이렇게 계속 우리인 게.
우리는 닮았고 또 다르잖아. 너무 닮아서 너무 다르다는 말을 너는 이해할 거야. 내가 우리 사이에 느끼는 감정들 역시 너는 알 거야. 41
나는 혼자인 시간이 많았고 너는 혼자일 시간이 없었어. 나는 혼자가 좋으면서 싫고 너는 혼자가 편하지. 나는 혼자 일 자신이 없고 너는 혼자일 수 있어. 나는 혼자라고 느끼고 너는 혼자이고 싶어 해. 나는 그만 외로움을 알고 싶고 너는 외롭고 싶어. 41.
김이슬과 하현, 둘 사이를 표현하는 문장이다. 닮으면서 다르지만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관계다.
그런 의미에서 문보영 시인은 배틀그라운드와 가장 먼지점에서 그것의 모든 걸 분석했어. 어쩌면 소외된 채로일지 모르지만, 이 세계는 둥글어서 자꾸 뒷걸음치다 보면 멀어지려는 것들과 등을 마주하게 되니까. 그렇다면 그녀는 등 뒤를 가장 잘 살피는 시인이 아닐까? 69.
나라는 패러디물을 가장 재밌게 시청할 사람은 아무래도 너 같아. 패러디를 패러디로 온전히 즐길 수 있으려면 원작에 대한 높은 이해도는 물론이고 이것이 패러디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니까. 너무 슬픈 상황에서도 너무 슬퍼하지 않고 너무 심각한 상황에서도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그런 사람. 그리고 보기 좋게 별 한 개짜리 평점을 줄 사람 역시 너일 거란 생각이 들어. 아마도 이런 코멘트와 함께이겠지. 72.
이슬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이라서 자신을 패러디해도 온전히 즐길 수 있으리라. 다른 이들과 다른 시야를 가진 문단 하나와 누구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문단 하나가 극명하다.
너는 알아.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내가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 너도 이렇게 스스로의 재능을 의심하며 쓴다는 공감, 결국 잘 해낼 거면서 엄살 부리지 말라는 타박, 일단 일어나서 밥부터 먹으라는 위로. 77.
글 쓰기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키다 한 글자라도 쓴다면 가장 큰 장벽이 되어 버리는 나 자신을 계속 쓰게 하는 건 주위에 있는 누군가다. 그들은 그럼에도 썼다. 타박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썼다. 한 권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많은 이들이 공감과 위로를 받는다.
사람들은 말해, 내가 다정하다고. 그리고 또 말하지. 네가 좀 까칠하다고.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웃잖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면서, 나는 그냥 예의를 지키는 건데, 틈을 주지 않으려고, 너는 그냥 애써 친절한 척하지 않는 건데, 가식을 견디지 못해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쉽게 말을 놓는 너와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나. 용건 없는 연락을 길게 이어 갈 수 있는 너와 용건이 있어도 연락하지 않는 나. 빈말을 잘 하지 않는 너와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나. 종종 다른 사람의 삶이 궁금한 너와 오직 내 삶에만 관심이 있는 나.
나는 다정하게 선을 긋고,
너는 무심하게 선을 넘지.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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