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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2권 - 제1부 한의 모닥불

category 글/책을읽다 2022. 12. 21. 10:42

pixabay.com

 

최익승이 남인태를 상대로 계략을 꾸민다. 청년단장에 염상구를 앉히는 데 남인태를 앞 세운다. 남인태는 원치 않지만 흘러가는 말들이 자연스러워 거스르지 못한다. 자신이 추천한 모양이 되어 되돌릴 수 없다. 김범우를 빨갱이로 몰아넣으려 한다. 남인태는 상대가 김범우여서 난처하다. 그 뒤에 있는 김씨 문중이 두렵다. 국회의원 최익승이 원하는 바가 김범우를 사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임을 깨닫고 용기백배한다. 최익승은 아들을 풀어내기 위해 김사용이 자신 앞에 고개 숙이길 기대한다. 그러나 남인태 서장은 자충수임을 알 수 없었다.

최익승은 '빨갱이'란 말을 무수히 되풀이했다. 그 말은 지칭(指稱)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호칭(呼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건 말이 아니었다. 공격의 무기였다. 지칭이든 호칭이든 상관없이 그 말은 되풀이될수록 기묘한 마력으로 육박해 왔다. 김범우는 그 말이 되풀이될 때마다 자신의 의식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위축감을 느껴야 했다. '빨갱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는 말과는 그 색깔이나 냄새나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극악한 범죄자의 대명사였고 극형의 죄목이었다. 그 말은 해방 이후 수삼 년에 걸쳐 그 어떤 말 보다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 느낌이 그렇게 살벌하거나 증오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익승의 입에 오른 그 말은 처형의 살기를 뿜고 있었다. 그 말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선택의 자유권을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생존권까지 좌우하게 된 상황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빨갱이라는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빨간색이 묻는 것은 당연, 곁에 있어도 빨갱이, 주황과 자주색이어도 빨갱이, 우익이 아닌 것은 모두 빨갱이다. 우익 중에서도 빨갱이는 나온다. 옷걸이에 어떤 옷을 걸쳐도 걸려든다. 권력을 가진 이와 맞서는 이는 빨갱이다. 그는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쉽다. 심지어 실적과 활약이 된다. 활용하는 측에서는 좋은 무기다. 능력으로 환산하기 쉽고 편 가르고 힘을 모으기에 좋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만한 게 없다.

"그렇지가 않소. 무릇 정치라는 것은 명분이나 합법으로 가장된 인간의 탐욕과 이기의 절정의 표현이지요. 하므로, 그 탐욕이나 이기를 채우는 데 반하는 모든 요소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시키는 것이 정치생리지요."

 

이념 전쟁을 구성하던 색깔론은 지금도 존재한다. 자신과 대립되는 사람에게 빨갱이와 북한을 들먹인다. 사실 관계는 중요치 않다. 그 단어가 가진 이미지를 덧씌우면 된다. 사실 관계는 없어지고 그 사람이 붉은가 그렇지 않은지가 중요해진다. 마지막에는 색깔은 중요치 않다. 덮어 씌운 혐의가 형벌이 된다.

"도대체 이념이 인간의 뭘 해결한다는 거야."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건 손승호의 말이었다. 한때 누구 못지않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손승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렇게 외쳤다.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손승호는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지만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은 그 말이 바로 외침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염상진이 그의 이마에 권총을 겨누고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까닭도 그 외침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판석은 하대치 아버지다. 좌익이 벌교를 장악했을 때 하대치는 노출되었다. 빨갱이 세상이 된 듯했다. 성급한 결론이었다. 그들에게 죽임 당한 지주 집안 자식들이 보복을 시작했다. 그 보복에 하판석은 죽었다. 며느리 들몰댁은 보복으로 세상을 떠난 시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굿을 떠올린다. 굿 잘하는 월녀를 찾아갔지만 무당은 죽어 장례 중이다. 그녀 딸 소화를 보고 얼굴을 익힌다. 나중을 기약한다. 꽤 오래 이어질 두 사람은 이렇게 시작한다.

 

월녀는 중풍을 맞아 거동이 어려웠다. 말을 하기 쉽지 않았다. 소화는 그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어머지가 떠나고 난 후 혼자 남게 될 것이 두려웠다. 소화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월녀는 소화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이제는 정참봉, 정하섭과 소화 간 관계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은 없다.

 

독립운동에 연루된 자들 중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것이 자식을 둔 자들이었다. 그들을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잡아다가 고문하면 신효 할 정도로 쉽게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부모를 고문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가 마누라를 고문하는 방법이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어 버린다더니 고문 앞에서 부부는 무촌이다. 남으로 살던 사람들이 만나 부부를 이루어 더 이상 가까울 수 없어 무촌이다. 몸과 마음 섞어 살다가 헤어지면 남이 되어 버리니 무촌이다. 

 

 
태백산맥 2: 제1부 한의 모닥불
1948년 10월,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주동은 좌익사상을 지닌 하급 지휘관들이었다. 여수와 순천이 그들 손에 넘어가고, 염상진을 중심으로 한 민간 좌익세력이 벌교를 장악한다. 그들은 인민재판을 열어 악질 지주들을 비롯한 이른바 반동세력을 공개처형한다. 하지만 토벌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밀린 반란군은 산악지역으로 퇴각하고, 벌교를 장악했던 염상진도 안창민, 하대치 등과 함께 입산, 빨치산 투쟁에 돌입한다. 그 즈음 대학생 정하섭은 남로당 상부의 명령에 따라 순천 지역에 파견되었으나, 상황이 불리해져 퇴각하면서 고향 벌교로 숨어든다. 그는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제각에 살고 있는 무당의 딸 소화를 몰래 찾아든다. 소화는 정하섭이 요구하는 비밀스런 심부름을 하게 되고, 둘 사이엔 애틋한 사랑이 싹트는데……. 친일 지주세력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지주들이 반대하는 농지개혁을 쉽사리 단행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지주들은 친척 앞으로 명의변경을 하거나 남에게 팔아넘기는 수법으로 농지를 빼돌린다. 반면 양심적인 지주이면서 무교화주의자인 서민영은 자기 땅을 소작농민들과 공유하여 협동농장을 세우고, 야학을 운영한다. 벌교의 계엄사령관이었던 심재모는 서민영, 김범우 등의 도움으로 겨우 용공 혐의를 벗고 풀려나 태백산 지구 공비토벌에 투입된다. 심재모의 후임 백남식도 보성과 벌교 산골짜기마다 병력을 투입해 빨치산 토벌에 나선다. 위기에 빠진 빨치산부대는 적극적인 투쟁에서 조직을 보존하고 살아남는 투쟁으로 돌아선다. 농지개혁이 실시되었으나 농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이승만 세력은 그 무렵 치러진 총선에서 크게 패배한다. 곧이어 6.25 전쟁이 발발한다. 인민군에 밀린 국군은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한다. 인민군이 남부지방까지 내려오자 벌교 경찰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된 보도연맹 원들을 모두 소집하여 벌교에서 철수하기 직전에 그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경찰이 떠난 뒤에 벌교는 다시 염상진, 안창민, 하대치 등의 좌익세력에게 장악되고, 그들은 읍면마다 인민위원회와 여성동맹위원회, 청년동맹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북식 농지개혁을 단행한다. 미군 부대를 탈출한 김범우는 눈 속을 헤매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되고, 인민군의 통역관을 맡게 된다.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삼팔선 부근에서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그런 상황에서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부대는 전남북과 경남, 지리산 일대에서 유격투쟁을 계속한다. 후방에서 빨치산 대원들이 입을 옷을 짓는 일을 하던 소화는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아기를 낳는다.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토벌대의 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빨치산들은 근거지인 해방구를 자꾸 잃어간다. 겨울을 맞아 토벌대는 엄청난 화력과 병력을 동원해 전남북과 경남, 지리산에 동계대공세를 편다. 가혹한 추위 속에서 수많은 빨치산들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에 맞아 죽어가며 시나브로 소멸되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항전을 멈추지 않는데…….
저자
조정래
출판
해냄출판사
출판일
2020.10.15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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