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승이 남인태를 상대로 계략을 꾸민다. 청년단장에 염상구를 앉히는 데 남인태를 앞 세운다. 남인태는 원치 않지만 흘러가는 말들이 자연스러워 거스르지 못한다. 자신이 추천한 모양이 되어 되돌릴 수 없다. 김범우를 빨갱이로 몰아넣으려 한다. 남인태는 상대가 김범우여서 난처하다. 그 뒤에 있는 김씨 문중이 두렵다. 국회의원 최익승이 원하는 바가 김범우를 사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임을 깨닫고 용기백배한다. 최익승은 아들을 풀어내기 위해 김사용이 자신 앞에 고개 숙이길 기대한다. 그러나 남인태 서장은 자충수임을 알 수 없었다.
최익승은 '빨갱이'란 말을 무수히 되풀이했다. 그 말은 지칭(指稱)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호칭(呼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건 말이 아니었다. 공격의 무기였다. 지칭이든 호칭이든 상관없이 그 말은 되풀이될수록 기묘한 마력으로 육박해 왔다. 김범우는 그 말이 되풀이될 때마다 자신의 의식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위축감을 느껴야 했다. '빨갱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는 말과는 그 색깔이나 냄새나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극악한 범죄자의 대명사였고 극형의 죄목이었다. 그 말은 해방 이후 수삼 년에 걸쳐 그 어떤 말 보다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 느낌이 그렇게 살벌하거나 증오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익승의 입에 오른 그 말은 처형의 살기를 뿜고 있었다. 그 말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선택의 자유권을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생존권까지 좌우하게 된 상황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빨갱이라는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빨간색이 묻는 것은 당연, 곁에 있어도 빨갱이, 주황과 자주색이어도 빨갱이, 우익이 아닌 것은 모두 빨갱이다. 우익 중에서도 빨갱이는 나온다. 옷걸이에 어떤 옷을 걸쳐도 걸려든다. 권력을 가진 이와 맞서는 이는 빨갱이다. 그는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쉽다. 심지어 실적과 활약이 된다. 활용하는 측에서는 좋은 무기다. 능력으로 환산하기 쉽고 편 가르고 힘을 모으기에 좋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만한 게 없다.
"그렇지가 않소. 무릇 정치라는 것은 명분이나 합법으로 가장된 인간의 탐욕과 이기의 절정의 표현이지요. 하므로, 그 탐욕이나 이기를 채우는 데 반하는 모든 요소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시키는 것이 정치생리지요."
이념 전쟁을 구성하던 색깔론은 지금도 존재한다. 자신과 대립되는 사람에게 빨갱이와 북한을 들먹인다. 사실 관계는 중요치 않다. 그 단어가 가진 이미지를 덧씌우면 된다. 사실 관계는 없어지고 그 사람이 붉은가 그렇지 않은지가 중요해진다. 마지막에는 색깔은 중요치 않다. 덮어 씌운 혐의가 형벌이 된다.
"도대체 이념이 인간의 뭘 해결한다는 거야."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건 손승호의 말이었다. 한때 누구 못지않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손승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렇게 외쳤다.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손승호는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지만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은 그 말이 바로 외침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염상진이 그의 이마에 권총을 겨누고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까닭도 그 외침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판석은 하대치 아버지다. 좌익이 벌교를 장악했을 때 하대치는 노출되었다. 빨갱이 세상이 된 듯했다. 성급한 결론이었다. 그들에게 죽임 당한 지주 집안 자식들이 보복을 시작했다. 그 보복에 하판석은 죽었다. 며느리 들몰댁은 보복으로 세상을 떠난 시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굿을 떠올린다. 굿 잘하는 월녀를 찾아갔지만 무당은 죽어 장례 중이다. 그녀 딸 소화를 보고 얼굴을 익힌다. 나중을 기약한다. 꽤 오래 이어질 두 사람은 이렇게 시작한다.
월녀는 중풍을 맞아 거동이 어려웠다. 말을 하기 쉽지 않았다. 소화는 그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어머지가 떠나고 난 후 혼자 남게 될 것이 두려웠다. 소화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월녀는 소화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이제는 정참봉, 정하섭과 소화 간 관계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은 없다.
독립운동에 연루된 자들 중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것이 자식을 둔 자들이었다. 그들을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잡아다가 고문하면 신효 할 정도로 쉽게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부모를 고문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가 마누라를 고문하는 방법이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어 버린다더니 고문 앞에서 부부는 무촌이다. 남으로 살던 사람들이 만나 부부를 이루어 더 이상 가까울 수 없어 무촌이다. 몸과 마음 섞어 살다가 헤어지면 남이 되어 버리니 무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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