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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권 - 제1부 한의 모닥불

category 글/책을읽다 2022. 12. 15. 14:43

pixabay.com

십 이년이 지나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겼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순으로 읽었었다. 띠가 한 바퀴 지날 시간이었다. 지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과거에 느낀 감정과 지금을 비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첫 장을 펼치고 잘못된 생각인 걸 알았다. 처음 보는 책을 접하듯 시작했다. 등단 50주년 개정판으로 나온 태백산맥은 더 두꺼워졌으나 읽기 편하게 잘 구성되어 있었다. 

 

태백산맥은 일정 치하 독립운동부터 동족상잔 비극을 느낀 6·25 전쟁과 휴전까지를 다룬다. 농민을 중심으로 다루었으며 백정, 무당 같이 피지배계층으로부터도 천하게 취급받은 층들이 활약하는 이야기다. 그들은 빨치산에서 다수를 구성했다. 빨치산에 대해 제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실제 역사를 이루었지만 이름 없는 민중으로 불렸던 사람들이 실제 주인공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태어나고 죽는다.

 

정하섭이 소화를 찾아가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꽃피고 아이들은 태어난다더니 그 둘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있었다. 하얀 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당, 소화는 그들에게 펼쳐질 미래를 미리 점친다. '다 신령님 뜻 인디' 소화는 정하섭과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길 신령에게 빈다. 두 사람 사이는 꼬여진 실타래처럼 벌써 얽혀간다. 첫 번째 권 답게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내용이 많다. 정하섭과 소화, 하대치, 김범우, 염상진, 안창민, 염상구, 김사용, 손승호, 선우진, 최익승, 정현동, 읍장, 전명환, 들몰댁, 윤태주, 현오봉, 송성일, 장터 댁, 이지숙, 강동식, 배성오, 문기수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염상진과 염상구는 형제다. 염상진은 첫째다. 집 안에서 기대를 받으며 두각을 드러냈다. 염상구는 기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외된다. 같이 싸워도 염상구가 혼나고 먹을 게 있어도 염상진을 먼저 챙긴다. 장자를 우선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시대다. 아이는 이해하지 않는다.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염상구와 염상진은 너무 틀어졌다. 염상진은 좌익을 지휘하는 자리에 서고 염상구는 좌익을 물리치는 민간 조직인 청년단장이다. 염상구는 염상진이 좌익이기 때문에 우익에 선다. 그 반대여도 위치가 바뀔 뿐 대립 구조는 같았을거다. 틀어짐은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사상으로 무장되지 않은 농민과 천한 계층이 어떻게 빨갱이가 되는지 알 수 있다.

"참말로 순사가 들었다 허먼 몽딩이찜질당헐 소리제만 서방님 앞이니께 하는 소린다. 사람덜이 워째서 공산당 허는지 아시요? 나라에서는 농지개혁한다고 말대포만 펑펑 쏴질렀지 차일피일 밀치기만 허지, 지주는 지주대로 고런 짓거리덜 해제, 가난하고 무식현 것덜이 워디 믿고 의지헐디 없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면 지주 다 쳐애고 그 전답 노놔준다는디 공산당 안 헐 사람이 워디 있겄능가요. 헐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 당께요!" 212.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했을 뿐이다. 사상에 씌어진 고고함과 이론을 통해 자기 학습보다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해 선택한 결과다. 산 밑에서 살 수 없으니 산으로 들어간다. 지주들이 농민으로 살지 못하게 하니 지주를 해하고 도망 다닌다. 나라를 운영하는 자들은 농민 편에 서지 않는다. 기대는 크게 하고 결과에 실망한다. 빨갱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 수단이었다. 좌익에서 말하는 미래는 달콤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할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이 듣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만 했다.

 

일제 치하 독립운동 단체에도 여러 성향이 있었다. 일본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해야 했다. 서로 간에 갈등이 적지 않았겠지만 전면에 드러나기에는 공통 적이 존재했다. 미국이 떨어뜨린 핵 미사일로 일본은 패전국이 된다. 한반도는 해방당한다. 한반도는 큰 나라들이 내뿜는 입김과 냉전 시대에 치열하게 충돌하던 이념 전쟁이 옮겨 왔다.

“좋아요, 어떤 주의를 따르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요. 그러나, 그것이 곧 민족 전체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성급한 판단은 금물입니다. 미국이다, 소련이다,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정치적 택일이 아닙니다. 그건 한 민족이 국가를 세운 다음에나 필요한 생활의 방편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민족의 발견입니다. 그 단합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해요." 111.

백범 김구(金九)식의 민족주의 통일노선을 김범우는 실현시키고자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범우는 경찰서고 군정청이고 드나들며 좌익계 학생들을 석방시키기에 바쁘고, 한편으로는 좌익 학생들을 설득시키느라고 진땀을 빼는 것이었다. 염상진은 그런 김범우를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그가 했던 '민족의 발견'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꽤는 그 의미가 넓고 깊은 말이라 싶었다. 민족 - 그건 모태와 같은 것이고, 음성적(音聲的)으로도 어머니를 부를 때처럼 정겨운 슬픔을 담고 있다.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은 소중한 말이다. 그러나 그건 일제하에서나 생기가 도는 말인 것이다. 이미 반도땅은 해방을 맞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바나 행동하는 것은 그 나름으로 일관성과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동지도 아니었고 적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동지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195.

 

좌와 우 사이에 그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을 중심에 둔 소수가 있었다. 김범우가 생각하는 것이 백범 김구가 가진 것과 같다. 좌우 사이에서 객관을 가지고 서로를 이해시키려 했다. 김범우는 양쪽에서 존경을 받으면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서로가 인정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인정은 자신을 부정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염상진은 일제하에서나 가능하지 해방되어 어떤 이념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 적당하지 않다 생각했다. 염상진은 일찍이 좌익으로 일제에 대항했다. 사회주의 믿음에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함께 좌익에 마음을 품고 가까이하던 염상진, 김범우, 손승호였다. 각자 겪은 생활로 더욱 깊은 믿음을 가진 염상진과 이념보다 민족을 우선시하는 김범우, 회의를 느꼈지만 반대로 넘어가지 못하고 사상이 부재하는 상황에 빠져있는 손승호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하지만 이해하려 했고, 서로를 끌어당겼다.

손승호는 감정의 동요 없이 말하며 입가에 찬 웃음을 물었다. 그는 작년 6월까지만 해도 좌익에 발을 넣고 있었다. 그런데 우익의 탄압에 맞선 좌익 테러가 속출하면서부터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국제공산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을 불문한 세력확장의 도구로 사용되는 허구성을 발견하고는 사상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버렸을 뿐 그 반대개념의 사상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상적 '전향'을 한 것이 아니라 사상의 공백상태에 있었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주의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 사상의 실현을 위해서 인간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점이었다. 인간을 위한 주의가 아니라 어떤 주의를 위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변질을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설득과 이해의 균형이 없이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그 어떤 주의나 사상보다는 차라리 원시상태가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손승호의 생각은 김범우의 생각과도 거리가 있었다. 김범우가 관심하는 '민족'이라는 자리에 손승호는 '인간'을 놓고 있는 셈이었다. 238.

염상진도 그의 앞에서는 사회주의 이론이 달릴 지경이었다. 그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길을 위하여 사회주의를 택했었다. 그런데 결국 그가 만난 것은 인간부재의 현실일 뿐이었다. “너를 죽이기는 아깝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염상진이 총을 거두며 한 말이었다. 그 순간에도 손승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비인간성에 환멸과 혐오를 느꼈을 뿐 살아나게 되었다는 기쁨을 느끼지는 않았다. 328.

 

염상진은 비밀 조직을 드러내며 벌교를 장악했다. 그런 염상진은 손승호에게 총을 겨누었으나 다시 거두었다. 손승호는 우익 탄압에 맞선 좌익 테러에서 회의와 국제 공산주의라는 것이 세력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허구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우익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어서 전향은 아니다. 선택한 사상을 계속 가지고 있지 못해 속에서 꺼내 둔 것이다. 다른 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이다.

 

김범우와 손승호는 양쪽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좌우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이들을 적으로 여긴다. 좌에게 우가, 우에게 좌만이 적이 아니다. 우가 아닌, 좌가 아닌 자는 모두 적이다. 결국에는 세력 싸움이 의사결정을 좌우한다.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고 상대방은 적어야 한다. 양쪽 모두 존재할 수 없다. 다수결은 주장하는 바가 옳아서가 아니라 힘이 제일 세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 유럽을 보면 여러 이념을 가진 정당이 함께 의회에 존재한다. 아쉽다. 서로 가진 장점을 끌어와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시간이 지나서야 가능해진 것을 보면 죽음과 시간이 아깝지만 지금이라도 이 정도라도 해서 다행이다. 

국민이 권력을 쥐면 다수결의 원칙을 허용한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다수가 국가를 지배하게 된다. 이는 다수가 옳을 공산이 가장 커서도, 소수에 비해 공정한 듯해서도 아니다. 힘이 제일 세기 때문이다. 

-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

 

상대되는 의미와 관계가 자주 등장한다.

어머니가 지니고 있는 그 소박하고도 아늑한 냄새가 집에는 언제나 훈훈하게 서려 있었다. 아교풀처럼 끈끈하게 도배된 술도가의 냄새는 오로지 아버지의 냄새였다. 정하섭은 그 두 가지 냄새를 확연히 구분해서 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읍내는 이미 접근할 수 없는 위험지대였다. 17.

 

숨김없는 이야기 속에 음담패설과 성기 이야기, 남과 여, 속에 담아 두고 밖으로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임무수행 중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소. 술과 여자요. 그건 둘 다 독이오. 술은 감정을 해이하게 만드는 독이고, 여자는 의지를 약화시키는 독이오. 철저히 경계하라. 단, 냉철한 당원의 이성으로 판단했을 때 사업에 절대이익을 줄 수 있는 여자까지 포함시키는 건 아니오. 그 판단기준은 당원의 이성에 맡기겠소." 36.

 

아름답고 낭만이 넘치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생활이지만 성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것을 꺼려한다. 태백산맥 속 많은 주인공들은 쉽게 이야기하며 서로 즐긴다. 성관계와 성기에 대한 묘사가 자주 있다. 조심스레 말하지 않으니 숨겨 둔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느낌은 아니다. 일상을 나눈다. 드러내니 오히려 천박하지 않고 자극을 주지 않는다. 침을 꼴깍 삼키다가도 웃겨 캑캑거린다.

 

 
태백산맥 1: 제1부 한의 모닥불
1948년 10월,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주동은 좌익사상을 지닌 하급 지휘관들이었다. 여수와 순천이 그들 손에 넘어가고, 염상진을 중심으로 한 민간 좌익세력이 벌교를 장악한다. 그들은 인민재판을 열어 악질 지주들을 비롯한 이른바 반동세력을 공개처형한다. 하지만 토벌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밀린 반란군은 산악지역으로 퇴각하고, 벌교를 장악했던 염상진도 안창민, 하대치 등과 함께 입산, 빨치산 투쟁에 돌입한다. 그 즈음 대학생 정하섭은 남로당 상부의 명령에 따라 순천 지역에 파견되었으나, 상황이 불리해져 퇴각하면서 고향 벌교로 숨어든다. 그는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제각에 살고 있는 무당의 딸 소화를 몰래 찾아든다. 소화는 정하섭이 요구하는 비밀스런 심부름을 하게 되고, 둘 사이엔 애틋한 사랑이 싹트는데……. 친일 지주세력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지주들이 반대하는 농지개혁을 쉽사리 단행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지주들은 친척 앞으로 명의변경을 하거나 남에게 팔아넘기는 수법으로 농지를 빼돌린다. 반면 양심적인 지주이면서 무교화주의자인 서민영은 자기 땅을 소작농민들과 공유하여 협동농장을 세우고, 야학을 운영한다. 벌교의 계엄사령관이었던 심재모는 서민영, 김범우 등의 도움으로 겨우 용공 혐의를 벗고 풀려나 태백산 지구 공비토벌에 투입된다. 심재모의 후임 백남식도 보성과 벌교 산골짜기마다 병력을 투입해 빨치산 토벌에 나선다. 위기에 빠진 빨치산부대는 적극적인 투쟁에서 조직을 보존하고 살아남는 투쟁으로 돌아선다. 농지개혁이 실시되었으나 농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이승만 세력은 그 무렵 치러진 총선에서 크게 패배한다. 곧이어 6.25 전쟁이 발발한다. 인민군에 밀린 국군은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한다. 인민군이 남부지방까지 내려오자 벌교 경찰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된 보도연맹 원들을 모두 소집하여 벌교에서 철수하기 직전에 그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경찰이 떠난 뒤에 벌교는 다시 염상진, 안창민, 하대치 등의 좌익세력에게 장악되고, 그들은 읍면마다 인민위원회와 여성동맹위원회, 청년동맹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북식 농지개혁을 단행한다. 미군 부대를 탈출한 김범우는 눈 속을 헤매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되고, 인민군의 통역관을 맡게 된다.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삼팔선 부근에서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그런 상황에서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부대는 전남북과 경남, 지리산 일대에서 유격투쟁을 계속한다. 후방에서 빨치산 대원들이 입을 옷을 짓는 일을 하던 소화는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아기를 낳는다.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토벌대의 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빨치산들은 근거지인 해방구를 자꾸 잃어간다. 겨울을 맞아 토벌대는 엄청난 화력과 병력을 동원해 전남북과 경남, 지리산에 동계대공세를 편다. 가혹한 추위 속에서 수많은 빨치산들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에 맞아 죽어가며 시나브로 소멸되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항전을 멈추지 않는데…….
저자
조정래
출판
해냄출판사
출판일
2020.10.15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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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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